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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이순신해

기사승인 2023.07.28  13: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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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해안의 진도부터 부산포까지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왜군을 무찌른 해전의 장소이다. 이에 이순신정신계승국회의원모임 및 역사바로잡기연구소가 중심이 되어 현재 남해와 이순신해의 병행표기에 대한 범국민 서명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또한, 김승남의원이 대표발의(61명)해 ‘남해의 이순신해 병행 표기 및 이순신기념사업 지원을 위한 특별법안’을 입법발의한 상태이다.

  1592년 4월 13일 시작된 임진왜란으로 왜군은 5월 2일 한양을 점령했고 한반도 전역이 왜군에게 짓밟히는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이런 절체절명의 상황 속에 이순신 장군은 옥포해전, 당포해전, 한산도대첩, 부산포해전 등에서 승리했다. 특히, 전라좌수군의 5월 옥포해전은 적선 26척을 침몰시키면서 조선 해전의 최초 승리로 기록되고 있다. 이에 북상하던 왜군은 병력 보충과 군수품 보급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보급 문제로 인해 강화회담을 진행했다. 이때 회담이 결렬되자 정유재란을 일으킨 왜군을 상대로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이순신 장군은 명량해전과 노량해전에서 승리해 결국 조선을 지켜낼 수 있었다. 하지만 노량해전에서 왜군의 유탄에 맞아 장군은 전사했다. 임진왜란 이후 장군은 1604년 선무(宣武) 1등공신과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에 책봉됐고 좌의정에 추증됐으며, 1793년에는 다시 영의정이 더해졌고, 2년 뒤에는 왕명에 따라 ‘이충무공전서’가 간행됐다.

  이순신 장군의 리더십은 학자마다 다양하게 정의하지만 크게 2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자존감이다. 리더로서 자존감을 가지고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조선 수군이 궤멸당한 이후 조정에서는 이순신 장군에게 수군을 버리고 육군에 합류하라는 지시를 내렸으나 결사항전의 의지를 다져 명량해전에서 큰 승리를 거뒀다.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자존감이야말로 현재 우리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정신이다. 둘째, 타인존중이다. ‘난중일기’에는 백성과 부하를 생각하는 마음이 잘 담겨있다. “맑으나 바람이 크게 불어 춥기가 살을 에는 듯 하였다. 각 배의 옷이 없는 사람이 거북이처럼 웅크리고 추위에 떠는 소리는 차마 듣지를 못하겠다. 군량미가 도착하지 않으니 걱정이 되었다. 병들어 죽은 사람들을 거두어 장사 지낼 임무를 수행할 사람으로 녹도 만호 송여종을 정해 보냈다.”(갑오년) 이처럼 일기에는 장군이 병사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고 애통해하는 내용이 많았다.

  국난극복사의 시각에서 바라본 이순신 장군은 민족적 성웅으로 전세계 해전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큰 위업을 남겼다. 박종화 작가는 그의 작품 ‘임진왜란’(역사소설)에서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을 막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났다가 임진왜란이 평정되니 성스러운 자태를 감추어 바람같이 스러진 것이었다.”라고 하며 장군을 묘사하고 있다. 장군은 성숙된 인격성, 생사(生死)에 초연한 모습, 확고한 신념 등을 바탕으로 본인의 삶을 영위했기에 가능한 업적이었다.

  영월에서도 이순신 장군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있다. 바로 영월초등학교, 내성초등학교, 쌍룡초토교분교, 주천초등학교이다. 1970년대 전국적으로 문화공보부 제75-1호에 따라 대량으로 복제된 이순신 조형물이 이들 학교에 설치된 것이다. 자라나는 우리의 청소년들이 이순신 장군의 리더십을 배우길 기원한다.

  마지막으로 독자 여러분이 시간을 내어 남해와 함께 이순신해 병행표기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온라인 서명운동에 동참하길 기원한다.(www.이순신해.kr)

 

윤병화 세경대 교수

<저작권자 © 영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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